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광의통화(M2)는 2026년 3월 기준 약 4,200조 원에 이른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직접 찍어낸 현금(본원통화)은 약 280조 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3,900조 원이 넘는 돈은 어디서 왔을까. 답은 시중은행에 있다. 우리가 쓰는 돈의 90% 이상은 은행이 대출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새로 생겨난다. 이를 ‘신용창조(credit creation)’라고 부른다.
예금이 먼저 있어야 대출이 가능하다는 통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이 예금자에게서 받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단순한 중개자라고 생각한다. 김씨가 은행에 1,000만 원을 예금하면, 은행은 그중 일부를 떼서 박씨에게 빌려준다는 식이다. 하지만 현대 회계와 금융 시스템에서 이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2014년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분기 보고서에서 이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은행 대출은 예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은행이 대출을 일으키면, 그 즉시 차입자의 계좌에 새로운 예금이 생성된다.” 즉, 대출이 먼저고 예금이 따라온다는 뜻이다. 회계 장부에는 ‘대출 자산’과 ‘예금 부채’가 동시에 같은 금액만큼 늘어난다. 이때 새로 만들어진 예금은 어디서도 가져온 돈이 아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컴퓨터 화면 위에서 숫자가 늘어날 뿐이다.
부분지급준비제도가 만드는 승수 효과
물론 은행이 무한정 돈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한국은행은 ‘지급준비율’이라는 제도를 통해 시중은행이 만들 수 있는 통화량을 통제한다. 한국의 경우 정기예금은 2%, 요구불예금은 7%의 지급준비금을 한국은행에 예치해야 한다. 즉, 시중은행은 받은 예금의 일정 비율은 따로 떼어두고, 나머지로 대출을 할 수 있다.
이 구조를 단순화해보자. A씨가 100만 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은행은 7만 원을 한국은행에 지준금으로 두고 93만 원을 B씨에게 대출한다. B씨가 그 돈을 다른 거래에 쓰면, 그 돈은 다시 어떤 은행에 예금으로 들어간다. 그 은행은 또 7%인 6만 5,100원을 지준금으로 두고 86만 4,900원을 또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처음 100만 원의 본원통화는 이론적으로 100만 원 ÷ 0.07 = 약 1,428만 원까지 시중에 풀릴 수 있다. 이것이 ‘통화승수’다.
실제 한국의 통화승수는 코로나 이전 약 15배 수준이었으나 2026년 현재 18배 안팎으로 회복된 상태다. 통화승수가 클수록 같은 본원통화로 더 많은 시중 통화가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이 금리로 신용창조를 조절하는 방식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직접 통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준금리가 낮으면 시중은행이 한국은행에서 더 싼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그만큼 대출 금리도 내려간다. 대출이 쉬워지면 가계와 기업이 더 많이 빌리고, 그 결과 신용창조가 활발해져 시중 통화량이 늘어난다. 반대로 기준금리를 올리면 대출이 위축되고 통화량 증가 속도가 둔화된다.
2020~2021년 코로나 시기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5%까지 내리자 가계대출 증가율이 연 7~8%대로 치솟았다. 시중 통화량(M2)은 2020년 한 해에만 9.8% 증가했는데, 이는 한국은행이 직접 돈을 찍어서가 아니라 시중은행의 신용창조가 폭증한 결과다. 반대로 2022년부터 기준금리가 3.5%까지 인상되자 가계대출 증가율은 1~2%대로 떨어졌고 M2 증가율도 둔화되었다.
신용창조가 만드는 자산 가격 변동
신용창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자산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다. 새로 만들어진 돈은 대부분 부동산, 주식, 채권 같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간다.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2017~2021년 사이 가계대출이 약 600조 원 증가하는 동안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약 80% 상승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신용창조로 새로 풀린 돈의 상당 부분이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된 결과다.
반대로 신용이 위축되는 시기에는 자산 가격이 빠르게 빠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신용창조가 일시에 정지되면서 주택가격이 3년간 30% 이상 하락했다. 한국에서도 2022~2023년 기준금리 인상으로 가계대출이 정체되자 서울 아파트 가격이 약 15% 조정받았다.
개인이 신용창조 사이클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신용창조 원리를 이해하면 몇 가지 실용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기준금리 결정은 단순히 대출이자 변동의 문제가 아니라 시중에 풀리는 통화량 전체를 좌우하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둘째, 자산 가격의 큰 흐름은 한국은행과 시중은행이 만들어내는 신용 사이클과 밀접하게 연동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분기마다 ‘금융안정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가계신용 증가율, 기업대출 증가율을 자세히 다룬다. 개인 투자자가 이 지표를 함께 본다면 거시 흐름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가계대출 증가율이 GDP 성장률을 크게 웃돌면 자산 시장이 과열될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신용 증가율이 빠르게 둔화되면 자산 가격 조정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매일 쓰는 돈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빚을 낸 결과로 존재한다. 이 사실은 단순히 흥미로운 경제 상식을 넘어, 금리 결정과 자산 가격 흐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