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통장 옆에 따로 만들어 둔 정기예금 통장을 1년 만에 열어보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분명 이자가 붙어서 잔고는 늘었는데, 막상 그 돈으로 사려던 물건의 가격표를 보면 1년 전보다 비싸져 있습니다. 통장 숫자는 분명히 커졌는데 살 수 있는 건 오히려 줄어든 듯한 이 찜찜함은 기분 탓이 아닙니다. 돈의 가치를 재는 자가 두 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삽니다.
통장 잔고는 늘었는데 왜 살 수 있는 게 줄었을까
우리가 은행에서 보는 금리는 거의 전부 ‘명목금리’입니다. 1억 원을 연 3% 정기예금에 넣으면 1년 뒤 300만 원의 이자가 붙는다는 약속, 그 숫자가 명목금리입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정직하게 늘어납니다. 문제는 그 1년 동안 세상의 물가도 같이 움직였다는 데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6년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 같은 달보다 2.6% 올랐습니다. 작년에 100만 원으로 사던 장바구니를 올해는 102만 6,000원을 줘야 똑같이 채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내 돈이 3% 늘어나는 동안,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가격은 2.6% 비싸졌습니다. 통장 숫자가 커진 만큼 세상 물건값도 따라 커졌으니, 실제로 손에 쥔 구매력은 거의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친 셈입니다. 이 ‘진짜 수익률’을 경제학에서는 실질금리라고 부릅니다.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값이 실질금리이고, 우리 지갑의 체감을 결정하는 건 명목금리가 아니라 이 실질금리입니다.
명목금리에서 세금과 물가를 빼면 남는 실질금리
실질금리를 제대로 계산하려면 한 단계가 더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자에 붙는 세금입니다. 한국에서 예금이자에는 이자소득세 14%에 지방소득세 1.4%를 더한 15.4%가 원천징수됩니다. 통장에 이자가 들어오기도 전에 은행이 먼저 떼고 나머지만 입금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짜 실질금리는 세 번의 차감을 거칩니다. 첫째 명목금리에서 출발해, 둘째 이자소득세 15.4%를 빼고, 셋째 물가상승률 2.6%를 뺍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2025년 7월 이후 2.50%에서 묶여 있고, 2025년 11월 기준 정기예금 평균금리가 2.81% 수준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계산은 더 냉정해집니다. 평균적인 예금에 돈을 넣은 사람의 세후·물가 반영 실질금리는 0%에 바짝 붙거나 마이너스 영역으로 내려갑니다. 통장 숫자는 분명히 늘었는데, 그 돈의 힘은 거의 늘지 않았거나 줄어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자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빠지는 함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0.1%포인트라도 금리를 더 주는 은행을 찾으려고 비교 사이트를 뒤지고, 우대조건을 채우려 카드를 만들고 자동이체를 겁니다. 1억 원 기준 0.1%포인트는 1년에 10만 원입니다. 그 10만 원을 더 받으려는 노력은 기특하지만, 정작 같은 1년 동안 물가가 2.6%, 금액으로 260만 원어치의 구매력을 가져갔다는 사실에는 무감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명목 숫자의 0.1%에는 예민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물가의 2.6%에는 둔감한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뒤집혀 있는 셈인데, 이건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명목금리만 큼지막하게 보여 주는 금융 환경에 우리 눈이 길들여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1억을 1년 묶은 직장인의 실제 계산
구체적인 숫자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연봉 5,000만 원을 받는 직장인이 비상금과 별도로 모아 둔 1억 원을, 시중에서 비교적 잘 쳐주는 연 3% 정기예금에 1년간 넣었다고 가정합니다.
먼저 명목이자는 1억 원의 3%인 300만 원입니다. 여기서 이자소득세 15.4%, 즉 46만 2,000원이 원천징수됩니다. 실제로 통장에 들어오는 세후 이자는 253만 8,000원이고, 세후 수익률로 환산하면 약 2.54%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전히 플러스라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같은 1년 동안 물가가 2.6% 올랐습니다. 1년 전 1억 원으로 살 수 있던 것을 올해 똑같이 사려면 1억 260만 원이 필요합니다. 내 통장에는 원금 1억 원에 세후 이자 253만 8,000원을 더한 1억 253만 8,000원이 들어 있습니다. 1억 260만 원이 있어야 본전인데 1억 253만 8,000원밖에 없으니, 구매력 기준으로는 약 6만 원이 부족합니다. 1년을 꼬박 묶어 두고 이자까지 받았는데,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으로 따지면 시작점보다 살짝 가난해진 것입니다. 실질금리로 환산하면 대략 마이너스 0.06%, 사실상 제자리걸음입니다. ‘안전하게 굴렸다’는 만족감의 실체가 이렇게 얇습니다.
“예금은 안전하다”는 말이 놓치는 함정
여기서 가장 흔한 오해를 짚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금은 원금이 보장되니까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예금자보호로 지켜지는 것은 통장에 찍힌 ‘명목 원금’이지, 그 원금의 ‘구매력’이 아닙니다. 1억 원이라는 숫자는 1년 뒤에도 1억 원으로 남아 있지만, 그 1억 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은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은 통장에서 직접 돈을 빼가지 않습니다. 대신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양을 조용히 줄여 갑니다. 영수증에도, 거래내역에도 찍히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물가가 비교적 안정된 2.6% 수준일 때도 이 정도인데, 물가가 한 번 크게 출렁이면 예금의 실질가치는 훨씬 빠르게 깎입니다. 불과 몇 해 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를 넘나들던 시기를 떠올려 보면, 그때 연 3% 안팎의 예금에 묶어 둔 돈은 세금을 빼기도 전에 이미 2%포인트 넘는 마이너스 실질금리를 떠안고 있었습니다. ‘원금이 안 줄었으니 본전’이라고 안심하던 사이, 실제 구매력은 매년 또렷하게 줄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금이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라, 예금의 안전함이 지켜 주는 영역과 지켜 주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손실이 무서운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복리로 누적되기 때문입니다. 자산이 두 배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어림하는 ’72의 법칙’을 물가에 거꾸로 적용해 보면, 물가가 매년 2.6%씩 오를 때 화폐의 구매력은 약 27~28년 만에 반토막이 납니다. 지금 1억 원의 값어치가 한 세대 뒤에는 5,000만 원어치로 쪼그라든다는 의미입니다. 30년 뒤 은퇴를 바라보며 현금만 쌓아 두는 전략이 생각보다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도 사실은 매년 손실을 선택하는 적극적인 결정일 수 있습니다.
실질금리를 지키는 오늘의 한 가지
그렇다고 예금을 당장 깨고 위험자산으로 갈아타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당장 써야 할 돈, 3~6개월치 비상금, 1~2년 안에 쓸 목적이 정해진 돈은 원금이 흔들리지 않는 예금에 두는 것이 여전히 정답입니다. 핵심은 모든 돈을 한 바구니의 잣대로만 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내 현금성 자산에 ‘실질금리 가격표’를 직접 붙여 보는 일입니다. 가지고 있는 예금·적금의 금리를 종이에 적고, 거기서 이자소득세 15.4%를 먼저 빼 세후 수익률을 구한 다음, 다시 물가상승률 2.6%를 빼 보세요. 계산기로 5분이면 끝나는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연 3% 예금이라면 세후 약 2.54%, 물가를 빼면 실질 약 마이너스 0.06%라는 숫자가 손으로 직접 나옵니다. 이 한 줄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막연히 ‘예금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이너스가 나온다면, 그 돈이 ‘반드시 1년 안에 써야 하는 돈’인지 ‘몇 년 묵혀도 되는 여윳돈’인지를 구분하는 것만으로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여윳돈이라면 ISA 같은 절세 계좌나 물가에 연동되는 자산, 분산된 포트폴리오 등 실질금리를 방어할 선택지를 차분히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종목 찍기가 아니라, ‘명목 숫자’가 아니라 ‘실질 구매력’으로 내 돈을 바라보는 습관입니다. 통장 잔고가 늘었다고 안심하기 전에,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비싸졌는지를 함께 보는 사람만이 진짜로 돈을 지킵니다.





